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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전설 ‘닥터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브라질 축구 선수라고 하면 대부분 축구 황제 ‘펠레’와 ‘호나우두’, ‘호나우지뉴’, ‘네이마르’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여기 브라질 축구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소크라테스(Sócrates Brasileiro Sampaio de Souza Vieira de Oliveira)’이다. 소크라테스는 브라질의 전설적인 축구 선수이다. 그는 축구를 넘어 지성인, 정치적 활동가, 그리고 사회 운동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소크라테스는 1954년 2월 19일, 브라질 벨렝두파라에서 태어나 지난 2011년 12월 4일 사망했다. 그의 신장은 약 192cm이며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클럽팀과 브라질 대표팀에서 활약했다. 그의 별명은 ‘닥터(O Doutor·의사)’이다. 그는 의대 졸업자이며, 현역 시절에도 의사 면허를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닥터 소크라테스’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러한 배경은 그가 축구 선수 중에서도 드물게 철학,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한 식견이 깊었던 인물이 된 원천이 되었다.

그는 1974년부터 1978년까지 보타포구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978년부터 1984년까지 코린치안스에서 활동했으며, 이 시기는 바로 그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상징적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코린치안스에서 뛰던 시절 그는 이른바 ‘코린치안스 민주주의 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

코린치안스 민주주의 운동

1980년대 초, 브라질은 군사 독재 정권 하에 있었고, 표현의 자유가 억압받던 시기였다. 동시에 1981년, 코린치안스 구단으로서는 새로운 단장 ‘발데마르 피레즈(Waldemar Pires)’가 부임하며 클럽 운영 전반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운영을 더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바꾸고자 했고, 그의 철학에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선수들이 반응했다.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카를로스, 카제그린지 등 당시 코린치안스의 주요 선수들은 “우리도 단순한 선수 노동자가 아니라 구단의 일원으로서 의사결정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라고 주장하며 ‘코린치안스 민주주의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이 운동은 훗날 전 세계 축구계에 강한 영감을 주었다. (한국프로축구선수협회는 선수들의 권익을 위한 노력에 앞장서기 위해 존재하며, 이는 코린치안스 민주주의 운동의 일부 이념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코린치안스 민주주의 운동의 핵심 중 하나는 선수단과 코치진, 스태프 전원이 구단의 모든 의사결정을 투표로 진행하자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훈련 시간과 숙소 위치, 원정 일정, 연봉 협상 등이 있다. 아울러 오랜 기간 구단의 악습으로 이어져 왔던 수직적 명령 구조를 폐지하고, 자율과 책임의 구조로의 전환을 도모했다. 또한 경기장 내외에서 군사정권 반대 및 정치적 메시지를 표출하였고, 유니폼에 ‘Democracia(민주주의)’라는 문구를 새기고 경기에 출전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행보는 ‘Democracia(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국민이 주권을 가진 정치 체제’, ‘선거를 통한 권력의 위임’,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법 앞의 평등과 다수결 원칙’, ‘소수 의견의 존중과 견제 장치의 필요성’이 바탕이 된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브라질 대중에게 정치 참여와 투표의 중요성을 호소하며 ‘Diretas Já!(직선제를 원한다)’를 공개적으로 외치기도 했다. 1982년 선거를 앞두고, 코린치안스 선수들은 “선거에 참여하자”, “투표하자” 같은 메시지를 담은 걸개를 들고 경기장에 입장했다. 이는 축구장을 ‘정치적 각성의 공간’으로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1984년, 군사정권은 여전히 대통령 직선제 법안을 거부했다.

“만약 내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는다면, 난 여길 떠날 것이다. 난 단지 축구선수가 아니라, 브라질 시민이다.”

당시 소크라테스는 100만 명의 시민이 모인 상파울루 중심 광장에서 “직선제가 통과되지 않으면 유럽으로 떠나겠다”라고 선언했다. 결국 법안이 부결되자, 그는 이탈리아 피오렌티나로 이적하며 코린치안스를 떠났고, 운동도 자연스럽게 종료되었다. 하지만 훗날 코린치안스 민주주의 운동은 브라질 내 민주화 운동과 직선제 쟁취에 큰 영향을 끼쳤다. 결과적으로 1989년에서야 브라질에서는 대통령 직접선거가 부활했다.

오늘날에도 이 운동은 ‘축구와 정치가 만난 가장 숭고한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정치적으로는 스포츠를 통한 민주주의 가치의 실천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또한 브라질 국민에게 정치 참여의 중요성에 대해 각인시켜준 사회 역할을 하였으며, 세계사적으로는 스포츠를 통한 저항운동의 전범이나 영감의 원천이 되었고, 축구에서는 선수 자율성과 집단 결정의 실험 사례로 기록되었다.

오늘날에도 코린치안스 팬들은 중요한 경기에서 ‘Democracia’를 상징하는 배너를 펼치고 있다. 또한 브라질의 정치 시위에서도 소크라테스의 이미지는 ‘자유’와 ‘저항’의 아이콘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자유의 상징 ‘닥터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피오렌티나에서 1년간 유럽 생활을 하였지만 정착하진 못했다. 이후 브라질로 돌아와 플라맹구, 산투스, 보타포구에서 뛰었다. 국가대표로는 60경기에 출전해 22골을 넣었으나 1982, 1986년 월드컵에서 아쉬운 성과를 달성했다. 그는 한때 알코올 중독과 싸우기도 했고, 향년 57세 간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승리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플레이하느냐이다.”

그는 축구 외에도 글을 쓰고, 방송에 출연하며 브라질 사회의 비판자 역할을 자처했다. 사망 전까지 정치, 사회, 축구에 대한 비판적 사고와 자유정신을 유지했던 소크라테스는 ‘코린치안스 민주주의 운동’이라는 단순한 축구 운동이 아닌, 브라질 군사 독재 정권 하에 펼쳐진 강력한 정치·사회적 저항운동의 중심이었다. 그는 민주주의 가치를 실천하려는 시도를 보인 전 세계 스포츠 역사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든 독보적인 사례의 인물로 평가받는다.

“내게 축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다. 축구는 나와 같은 이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는 언어다.”

동시에 그는 인류애 역시 중요하게 생각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어느 한 기자로부터 촬영된 사진 속 그의 머리띠에는 “MÉXICO SIGUE EN PIE”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이는 “멕시코는 여전히 굳건하다”라는 의미로, 1985년 9월 19일 멕시코시티에서 발생한 대지진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재건에 힘쓰는 멕시코 국민들에게 연대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다.

이 문구는 당시 월드컵 개최국인 멕시코에 대한 전 세계의 지지와 연대를 호소한 것이었으며, 소크라테스는 축구를 통해 정치·사회적 메시지를 전한 대표적인 인물답게 경기장 위에서 인류애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행동가였으며 자신의 인기와 커리어, 명예보다는 국가의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 무엇보다 인류애를 우선시했다.

그의 생에 곳곳엔 철학과 저항, 자유, 기품, 그리고 인간미가 깃들어져 있으며 조국을 향한 사랑과 희생정신을 느낄 수 있다. 그라운드 위의 패스만큼이나 다양한 메시지를 대중에 전달한 소크라테스. 무엇보다 그는 축구를 “즐기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며, 항상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다.

수원삼성 블루윙즈 서포터즈 그룹 아발란차의 심볼은 브라질의 전설 소크라테스이다. 이는 정치사상, 상징과는 전혀 상관없으며, 내 생각에는 단지 그의 비판적 사고와 자유정신 철학에 대한 존경의 의미가 담겨있다. 그는 브라질뿐만 아니라 세계 축구사의 상징적 인물임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축구는 즐기기 위한 것’이라는 사고는 ‘응원은(축구는) 즐기기 위한 것’이라는 아발란차의 모토와 공통점이 있다. 축구 응원 그 자체를 즐기며, 상대 팀의 도전, 팀과 서포터를 향한 어떠한 억압과 부당함에도 절대 굴복하지 않는 자세,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NO TEMO(두렵지 않다)’는 전설 소크라테스가 그랬던 것처럼, 서포터가 가져야 할 멘탈을 재해석한 슬로건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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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출처 : https://blog.naver.com/barrabrava365/223873021838
※ 최초 작성일 : 2025. 05.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