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나 세르비아의 모든 축구 팬에게 1990년 5월 13일은 매우 중요한 날이다. 축구 팬이 아닌 일반적인 크로아티아인이나 세르비아인에게도 이날은 의미가 있다. 과거 유고슬라비아를 구성했던 현재의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또한 꽤 중요한 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축구는 종종 단순한 90분짜리 경기 그 이상이 되기도 하며, 이날의 사건들은 그것을 더할 나위 없이 잘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고슬라비아
이 특정한 날의 사건을 다루기에 앞서, 역사적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정치에 대해 매우 간략하게 요약된 정보를 소개한다.
유고슬라비아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과 이탈리아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사회주의 국가가 수립되었으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등 여섯 개 공화국으로 구성된 연방이었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가 대통령으로 재임했고, 그는 항상 통합된 유고슬라비아를 옹호했다. 이는 독립 국가에 대한 이견이나 논의가 종종 강제로 억압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티토는 1980년에 사망했고, 1980년대 전반에 걸쳐 유고슬라비아 경제는 심각한 침체를 겪었으며, 매우 높은 수준의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이러한 경제적 불안은 이미 타오르고 있던 불길에 기름을 부었고, 그 중심에는 민족 간 긴장과 여섯 개 공화국 대부분에서 점점 커져가는 독립 요구가 있었다.
1990년 4월로 넘어가며, 위에서 언급한 여러 요인들로 인해 크로아티아는 5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지방 선거를 실시하게 된다. 여기에서 ‘HDZ(크로아티아 민주연합)’가 다수 의석을 차지했으며, 이들의 입장은 매우 단순하고 분명했다.
“유고슬라비아로부터의 완전한 크로아티아 독립”
이 선거 결과는 이미 고조되고 있던 인접국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의 긴장에 더욱 불을 붙였다. 간단히 말해, 크로아티아는 유고슬라비아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원했고, 세르비아는 유고슬라비아의 통합 유지를 원했다.
유고슬라비아 퍼스트 리그 1923 – 1992
마지막으로 알아야 할 역사적 배경은 ‘디나모 자그레브(GNK Dinamo Zagreb)’와 ‘레드스타 베오그라드(Red Star Belgrade·현 츠르베나 즈베즈다)’ 간의 그라운드에서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명확히 해두자면, 이 두 클럽 사이에는 이미 상당히 치열한 스포츠 라이벌 관계가 존재했다.

정치적인 요소를 모두 제거하더라도, 디나모와 레드스타는 서로를 좋아하지 않았다. 레드스타는 트로피 면에서 훨씬 더 화려한 기록을 자랑한다. 유고슬라비아 퍼스트 리그 타이틀을 총 18회 차지했으며, 상위 세 팀 밖으로 밀려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들은 유고슬라비아 내전 발발로 리그가 해체되기 전 마지막 세 시즌 연속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1991년 유러피언컵(현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반면 디나모는 대부분의 시즌에서 리그 상위권을 다투기는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유고슬라비아 퍼스트 리그 타이틀을 네 차례만 차지했다. 그 마지막 우승은 1981/82 시즌에 있었다. 두 팀 간의 경기는 대체로 매우 치열하고 경쟁적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관중석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이는 팬들 간의 폭력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여기에 앞서 언급된 정치적, 경제적 문제들이 더해지면서, 1990년 무렵 디나모 자그레브 vs 레드스타 베오그라드 두 팀의 맞대결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다이너마이트’가 되어 있었다.
델리예(Delije) & 아르칸(Arkan)
경기는 예정되어 있었다. 유고슬라비아 퍼스트 리그에서의 디나모 자그레브 vs 레드스타 베오그라드의 경기, 장소는 자그레브의 막시미르 스타디움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그날의 분위기는 초반부터 이미 결정되었다. 대략 2,000명에서 2,500명 사이의 레드스타 팬들이 베오그라드에서 기차를 타고 자그레브로 도착한 것이다. 레드스타 팬들이 다니는 곳마다 도시 곳곳에서 충돌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 대규모 집단은 울트라스 그룹인 ‘델리예(Delije)’가 이끌었다. 이 그룹의 리더는 바로 악명 높은 ‘젤리코 라즈나토비치(Željko Ražnatović)’, 흔히 ‘아르칸(Arkan)’이라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아르칸은 구 유고슬라비아 모든 지역에서 매우 잘 알려진 이름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동안 그는 델리예의 리더였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아르칸은 이후 세르비아 민병대 조직인 ‘세르비아 자원 수비대(Serb Volunteer Guard)’의 수장이 되었다.

위 사진은 전쟁 당시 ‘아르칸의 호랑이들(Arkan’s Tigers)’로 불렸던 세르비아 자원 수비대. 그리고 마스크를 쓰지 않은 인물이 바로 아르칸이다. 그는 2000년, 베오그라드의 한 호텔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 단체는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전쟁 동안 유고슬라비아 전역에서 전쟁 범죄를 저지른 책임이 있으며, ‘아르칸의 호랑이들(Arkan’s Tigers)’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전역의 수많은 울트라스 및 훌리건 그룹처럼, 많은 남성들이 경기장 관중석을 떠나 전쟁터로 향했고, 델리예의 여러 구성원들도 아르칸의 호랑이들에 합류했다.
이러한 움직인은 디나모 자그레브의 울트라스 그룹 ‘배드 블루 보이즈(Bad Blue Boys)’ 구성원들에게도 전쟁 발발과 함께 동일하게 나타났다.
배드 블루 보이즈(Bad Blue Boys)
1990년 5월 13일로 돌아가 보자. 레드스타 베오그라드 팬들은 자그레브의 막시미르 스타디움 원정석에 도착했다. 킥오프 시간이 다가오자, 친세르비아적 구호와 반크로아티아적 구호가 점점 격렬해졌고, 이는 돌을 던지는 행위, 경찰과의 충돌, 그리고 결국 원정석에서 주 관중석으로의 난입으로 이어졌다.
주 관중석은 막시미르 스타디움 내에서 ‘가족 구역’으로 여겨졌으며, 이곳에는 수천 명의 디나모 자그레브 팬들이 있었고, 그중 많은 이들이 여성과 어린이들이었다. 그 순간 등장한 것이 바로 ‘배드 블루 보이즈(Bad Blue Boys)’였다. 배드 블루 보이즈는 디나모 자그레브가 델리예에 맞서 내세우는 울트라스 그룹이다.
이들은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디나모 자그레브에서 가장 큰 울트라스 조직이며, 수천 명 규모를 자랑한다. 1986년 창설된 이 그룹은 크로아티아 독립을 적극 지지했으며, 따라서 델리예와 그 외 친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인들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에 본질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레드스타 팬들이 원정석을 뚫고 주 관중석으로 난입하자, 배드 블루 보이즈는 그들을 향해 맞서기 위해 자신들의 구역을 빠져나가려 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당연히 경찰과의 충돌이 발생했다. 킥오프 예정 시각 약 10분 전, 배드 블루 보이즈는 결국 경기장 안으로 진입했다.
축구 경기가 실제로 열릴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고, 심판진과 대부분의 선수들은 빠르게 터널을 통해 경기장을 떠났다. 스타디움 전체는 경찰, 배드 블루 보이즈, 그리고 델리예 사이의 전쟁터로 변모했다. 이때부터 ‘막시미르 폭동’이 전면적으로 벌어졌다.
즈보니미르 보반의 발차기
막시미르 폭동은 여러 가지 이유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지만, 그중에서도 진정으로 상징적인 한 장면이 있다. 당시 디나모 자그레브의 주장 ‘즈보니미르 보반(Zvonimir Boban)’은 관중석에서 벌어진 폭력이 그라운드로 번지는 와중에도 여전히 경기장 위에 남아 있었다.
그때 보반은 경찰이 경기장 안에 쓰러져 있던 디나모 팬을 과잉 진압하며 곤봉으로 구타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보반은 즉시 행동에 나섰다. 그는 전속력으로 달려가 팬을 공격하던 경찰관에게 발차기를 날렸고, 그를 땅에 쓰러뜨렸다.
이 장면은 TV 카메라에 그대로 잡혔고, 이는 크로아티아 전역에서 보반을 민족적 영웅이자 애국자로 추앙받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이들이 당시 경찰을 친 세르비아적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기에, 보반의 행동은 그러한 권력에 맞선 용기 있는 행동으로 해석되었다. 이 장면은 매우 유명하며, 많은 크로아티아인들에게는 독립을 향한 결정적 순간 중 하나로 기억된다.

보반은 그 발차기 사건으로 인해 유고슬라비아 축구 협회로부터 6개월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고, 이로 인해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징계가 끝난 후 그는 다시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에 복귀해 뛰기도 했다. 그는 이후 AC 밀란에서 10년 동안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갔으며, 크로아티아가 독립 국가로서 UEFA에 가입한 이후에는 크로아티아 대표팀으로도 활약했다.
막시미르 폭동의 여파
이 폭동으로 60명 이상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부상의 종류는 총상, 자상, 구타, 짓밟힘, 최루탄에 의한 피해 등 다양했다. 놀랍게도, 그날 스타디움 안에서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체포자 수는 셀 수 없이 많았고, 상황은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정치적 파장은 엄청났다. 비난의 화살과 다양한 음모론이 쏟아져 나왔다.
예를 들어, 많은 크로아티아인들은 이번 폭동이 유고슬라비아 정부, 경찰, 그리고 델리예가 완전히 사전에 계획한 것이라고 믿는다. 이유는 지방 선거를 통해 집권한 ‘HDZ(크로아티아 민주연합)’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이들이 자국 도시에서조차 질서를 유지하지 못하는 무능한 지도자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날 경찰이 원정 온 레드스타 팬들에게는 상대적으로 관대하게 대응하고, 대신 디나모 팬들이 과격해지지 않도록 통제하는 데 더 집중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보고들도 존재한다. 이는 당시 중앙 유고슬라비아 정부의 통제를 받던 경찰이, 현장에 있던 친 유고슬라비아 성향의 레드스타 팬들 편에 섰다는 서사와 연결된다. 이러한 주장들 중 어느 것도 공식적으로 입증된 적은 없으며, 다만 이는 이미 중대한 하루였던 그날에 더 많은 긴장감과 논쟁거리를 더할 뿐이다.
많은 매체들이 막시미르 스타디움 폭동을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도화선으로 묘사한다. 물론 이 사건은 유고슬라비아가 전쟁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에서 즉각적인 전면 무력 충돌로 이어진 결정적 분기점은 아니었다.

막시미르 폭동 이후에도, 실제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정치적 의미가 매우 강했던 다른 축구 관련 사건들이 여러 차례 있었다. 1990년 6월, 대부분이 크로아티아인으로 구성된 관중들은 한 국제 경기에서 유고슬라비아 국가가 연주되자 야유를 퍼부었다. 같은 해 9월, 크로아티아 클럽 ‘하이두크 스플리트(Hajduk Split)’의 팬들은 스플리트에서 열린 경기 도중 유고슬라비아 국기를 불태우고, 크로아티아 독립을 외치는 구호를 외쳤다.
축구는 전쟁이 공식적으로 발발하기 전인 1991년 3월 이전부터, 정치적 분열을 부각시키고 전쟁의 불씨를 지피는 데 확실한 역할을 했다. 막시미르 폭동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촉발시킨 단 하나의 사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전쟁으로 가는 길 위의 또 하나의 단계였으며, 당시 유고슬라비아 내부의 분열을 보다 넓은 대중에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축구와 정치는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본질적으로 얽혀 있는 존재이다. 자그레브에서 벌어진 막시미르 폭동은 이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1990년 무렵 유고슬라비아는 이미 기반 자체가 무너지고 있었으며, 언제나 그렇듯 축구 관중석에서 나타나는 태도, 여론, 표현 방식은 당시 해당 지역의 정치적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었다.
※ 새로운 정보 파악 시, 본 콘텐츠에 계속 업데이트 됩니다.
※ 원문 출처 : https://blog.naver.com/barrabrava365/223894788339
※ 최초 작성일 : 2025. 06.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