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축구에서 가장 독특한 울트라스 그룹 가운데 하나로 꼽혀온 크리스탈 팰리스의 ‘Holmesdale Fanatics(HF05)’가 20년 넘게 이어온 조직적 활동을 중단한다.
Holmesdale Fanatics는 2026년 8월 27일 공식 성명을 발표하고 현재의 잉글랜드 축구 환경에서는 자신들이 추구해온 적극적인 서포터 문화를 지속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앞으로 셀허스트 파크에서 HF05 명의로 진행해온 조직적인 응원과 활동을 중단하기로 했다.
이는 사실상 그룹의 해체를 선언한 것이다. 다만 그룹 구성원들은 앞으로도 크리스탈 팰리스 경기를 찾을 예정이며, 공식 조직이 아닌 오랜 친구이자 팰리스의 팬으로 관중석에 남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2005년 탄생한 잉글랜드의 이례적인 울트라스
Holmesdale Fanatics는 2005년 결성됐다.
그룹 공식 기록에 따르면 창립 멤버들은 어린 시절부터 크리스탈 팰리스를 응원해온 사우스 런던 지역 팬들이었으며, 1999년부터 Holmesdale Road Stand의 Block B에 함께 모여 있었다.
당시 이들이 문제의식으로 삼았던 것은 현대화된 잉글랜드 축구장의 변화였다.
전석 좌석제와 강화된 경기장 규정, 상업화, TV 중심의 축구 산업 속에서 과거 테라스 문화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고 판단한 이들은 유럽 대륙에서 발전한 울트라스 문화의 요소를 도입했다. 깃발과 배너, 대형 티포, 드럼, 지속적인 응원과 집단적인 관중석 활동은 이후 Holmesdale Fanatics를 상징하는 특징이 됐다.
이 같은 문화는 울트라스가 전통적으로 강하지 않았던 잉글랜드 축구에서 더욱 눈에 띄었다.
Holmesdale Fanatics는 시간이 지나면서 셀허스트 파크 특유의 분위기를 만드는 핵심 집단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았고, 영국 언론에서도 크리스탈 팰리스의 강렬한 홈 분위기를 설명할 때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존재가 됐다.

“현재의 구조로는 지속할 수 없다”
21년 만에 활동 중단을 결정한 이유로 Holmesdale Fanatics가 가장 강하게 제기한 문제는 현대 축구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서포터에게 점점 불리한 환경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HF05는 높은 티켓 가격과 각종 경기장 규제, 팬들을 대상으로 한 법적 조치와 통제가 젊은 세대의 경기장 진입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팰리스 내부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가진 적극적인 팬들이 충분한 규모로 한곳에 모이기 어려워졌으며, 장기적으로 새로운 세대가 유입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Holmesdale Fanatics는 단순히 경기를 관람하고 서비스를 제공받는 관중 문화보다는, 팬 스스로 응원에 참여하고 경기장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문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보여왔다. 이번 성명에서도 팰리스가 젊은 팬을 중심에 두는 방향으로 큰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원정 경기 환경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HF05는 잉글랜드 국내 원정에서 배너와 응원 도구 반입이 제한되는 사례, 경찰의 원정 버스 통제와 체포 등 적극적인 팬 문화가 각종 규제와 충돌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러한 내용 가운데 ‘과도한 통제’나 ‘젊은 팬이 축구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평가는 Holmesdale Fanatics 측의 문제 제기와 해석이라는 점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모든 사례가 독립적으로 검증된 객관적 통계라는 의미는 아니다.


구단과의 갈등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Holmesdale Fanatics와 크리스탈 팰리스의 관계가 항상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8년 발생했다. 당시 HF05는 Holmesdale Road Stand의 구석에 위치한 Block B에서 골대 뒤 중앙에 가까운 Block E로 이동해 대규모 ‘싱잉 섹션’을 만들기를 원했다.
그러나 Block E에는 오랫동안 해당 좌석을 사용한 시즌티켓 보유자들이 있었고, 이들을 다른 위치로 이동시키는 문제를 둘러싸고 그룹과 구단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Holmesdale Fanatics는 결국 2018/19시즌 초반 단체 활동을 하지 않았고 셀허스트 파크의 홈 경기에서 한동안 모습을 감췄다. 이후 양측이 다시 협의를 진행하면서 그룹은 복귀했고, 2019년부터 Block E를 중심으로 새로운 싱잉 섹션이 운영됐다.
따라서 2026년 발표가 Holmesdale Fanatics 역사상 처음 발생한 활동 중단은 아니다.
그러나 2018년 상황이 특정 좌석과 싱잉 섹션 문제를 둘러싼 일시적인 갈등이었다면, 이번에는 그룹 스스로 현재의 축구 환경에서는 HF05라는 조직을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렵다는 보다 구조적인 이유를 제시했다는 차이가 있다.

크리스탈 팰리스의 위기와 성공을 함께했던 HF05
Holmesdale Fanatics의 역사는 크리스탈 팰리스의 지난 20년과도 상당 부분 겹친다. 특히 2010년 팰리스가 재정 위기와 법정관리 상태에 놓였을 당시 HF05는 구단의 생존을 요구하는 팬 시위에 적극 참여했다.
그룹 공식 기록은 셀허스트 파크와 런던 Lloyds Bank 앞에서 진행된 시위 등을 자신들의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가디언지 역시 HF05가 당시 Palace 팬들의 구단 생존 운동에서 주요 역할을 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2010년의 구단 생존은 다양한 팰리스 팬과 서포터 조직의 움직임, 인수 과정 등 여러 요소가 결합된 결과였으며 HF05는 그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한 그룹 가운데 하나였다.
HF05는 프리미어리그 원정 티켓 가격 문제에서도 적극적인 캠페인을 진행했다.
그룹은 자신들의 활동이 2016년 도입된 프리미어리그 원정석 티켓 £30 상한제에 영향을 줬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HF05를 비롯한 여러 서포터 집단이 티켓 가격 인하 운동에 참여한 것은 확인된다.
Football Supporters’ Federation이 추진한 ‘Twenty’s Plenty’를 비롯해 영국 각 클럽의 다양한 서포터 조직이 수년간 공동 캠페인을 벌였고, 프리미어리그 20개 구단이 2016년 최종적으로 £30 상한제에 합의했다. HF05는 해당 운동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FA컵과 유럽 우승까지 함께한 마지막 황금기
Holmesdale Fanatics의 마지막 몇 년은 역설적으로 크리스탈 팰리스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시기와 맞물렸다.
2025년 5월 크리스탈 팰리스는 웸블리에서 맨체스터 시티를 1-0으로 꺾고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FA컵 정상에 올랐다. 당시 Holmesdale Fanatics가 제작한 대규모 티포 역시 큰 관심을 받았다.
FA컵 결승 티포 제작에는 수많은 팬들의 모금과 작업이 투입됐으며, 팰리스 구단 역시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Holmesdale Fanatics가 제작한 서포터 디스플레이와 모금 활동을 소개했다.
1년 뒤인 2026년 5월에는 크리스탈 팰리스가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UEFA 컨퍼런스리그 결승에서 라요 바예카노를 1-0으로 꺾으면서 구단 역사상 첫 UEFA 클럽대항전 트로피까지 획득했다.
즉 HF05는 팰리스가 재정 위기로 존립 자체를 걱정하던 시절부터 구단 역사상 최초의 주요 국내 트로피와 유럽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순간까지 같은 관중석에 있었다.
이 때문에 그룹 역시 마지막 성명에서 지난 20년을 팰리스 역사에서 자신들이 함께 써 내려간 하나의 장으로 평가했다.

HF05가 사라진 첫 번째 셀허스트 파크
공식 발표 다음 날인 2026년 8월 28일, 크리스탈 팰리스는 맨체스터 시티를 상대로 시즌 첫 홈 경기를 치렀다. 이 경기에서는 Holmesdale Fanatics의 조직적인 활동이 실제로 사라졌다.
PA Media는 경기 전날 발표된 HF05의 활동 중단 소식을 전하며 피에르 세이지 감독의 첫 셀허스트 파크 공식 경기에서 Holmesdale Fanatics의 부재가 눈에 띄었다고 보도했다. 경기는 맨체스터 시티의 4-1 승리로 끝났다.
Holmesdale Fanatics가 지난 20년 동안 만들어온 응원과 티포, 싱잉 섹션의 역할을 앞으로 누가 이어갈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한 가지다.
2005년 사우스 런던의 작은 팬 그룹으로 시작해 잉글랜드에서 보기 드문 울트라스 문화를 구축하고, 셀허스트 파크의 정체성을 만드는 데 영향을 미쳤던 HF05의 21년간 조직 활동에 일단 마침표가 찍혔다.
그리고 이번 사건은 단순히 하나의 서포터 그룹이 사라지는 문제를 넘어, 상업화와 경기장 규제가 강화된 현대 잉글랜드 축구에서 젊은 팬과 적극적인 서포터 문화가 어떤 방식으로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남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