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를 대표하는 두 거대한 축구 서포터 조직이 ‘인종차별 반대’라는 이름 아래 다시 만났다.
브라질 코린치안스의 대표적인 토르치다 오르가니자다 Gaviões da Fiel(가비오이스 다 피에우·한글 표기상 ‘피엘’로 기재하고자 함)과 아르헨티나 보카 주니어스의 바라브라바 La12(라 도세)다.
이번 만남의 핵심 주제는 단순한 친선 교류가 아니었다. 두 조직은 축구계의 인종차별에 대응하기 위한 국제 공동 캠페인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만남은 더욱 흥미로운 배경을 가지고 있다.
불과 몇 년 전 코린치안스와 보카 주니어스의 맞대결에서는 아르헨티나 원정팬들의 인종차별 행위가 반복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이다.
폭력과 대립의 이미지로 자주 언급되는 남미의 거대 서포터 조직들이 이제 스스로 ‘인종차별 없는 축구장’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시 만난 코린치안스 & 보카 양측 지도부
코린치안스는 리베르타도레스 원정을 위해 로사리오 센트랄과의 경기를 앞두고 있었고, Gaviões da Fiel 관계자 일부는 본대보다 먼저 아르헨티나에 도착했다. 이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La12 관계자들과 만났다.
Gaviões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에서 이들을 맞이한 La12 측 인사는 마우로 마르틴, 라파엘 디 제오, 마르셀로 아라베나다.
라파엘 디 제오와 마우로 마르틴은 오랫동안 La12의 권력 구조를 대표해온 인물들이다. 마르셀로 아라베나는 La 12 내부에서 ‘Lomas’ 계열과 연결된 주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번 만남은 단순히 코린치안스 팬 몇 명과 보카 팬 몇 명이 만난 사적인 교류라기보다, 양측 대표 조직의 지도부가 참여한 공식적인 접촉에 가깝다.
핵심 의제는 ‘축구계의 인종차별’
두 조직이 이번 만남에서 가장 강조한 것은 축구계의 인종차별 문제였다. Gaviões da Fiel은 이번 회동을 공개하면서 양측이 축구에서 인종차별에 맞서기 위한 공동 행동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목표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양측은 향후 다른 축구팬들에게까지 메시지를 확대하는 국제적인 반인종차별 캠페인을 추진하겠다는 구상을 공개했다.
Gaviões는 축구가 인종과 국적을 넘어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하는 공간이어야 하며, 인종차별을 더 이상 경기장에서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번 회동에서는 반인종차별 캠페인 외에도 양측의 응원문화와 관중석에 관한 이야기, 서로에 대한 존중과 향후 관계 등에 대해서도 대화가 오간 것으로 전해졌다.
두 조직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번 아르헨티나 회동에서 중요한 부분이 있다.
Gaviões와 La12의 반인종차별 논의는 이번에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다. 두 조직은 약 한 달 전인 지난 7월에 브라질 상파울루에서도 만났다.
당시 La12 관계자들이 Gaviões da Fiel의 본거지를 방문했고, 양측은 처음으로 국제적인 반인종차별 캠페인을 공동 추진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당시 Gaviões 측은 향후 추가 회의를 거쳐 캠페인의 구체적인 방향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한 달여 뒤 장소를 아르헨티나로 옮겨 두 번째 논의가 진행된 것이다.
따라서 현재 상황은 일회성 사진 촬영이나 친선 이벤트보다는 실제 공동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단계에 가깝다. 다만 구체적인 캠페인 명칭과 실행 방법, 참가 조직, 일정 등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사실 두 조직의 관계는 훨씬 오래됐다
Gaviões da Fiel과 La12의 관계는 이번 반인종차별 캠페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두 조직 사이의 교류는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
아르헨티나 탐사·스포츠 기자 Gustavo Grabia의 보도에 따르면 양측의 초기 접촉은 카를로스 테베스가 코린치안스에서 뛰었던 2005~2006년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만 항상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코린치안스와 보카가 남미대항전에서 중요한 승부를 벌이면서 양측 사이의 긴장도 존재했다.
대표적인 경기가 2012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이다. 당시 코린치안스는 보카를 꺾고 구단 역사상 최초의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차지했다. 2013년에는 다시 리베르타도레스 16강에서 만나 이번에는 보카가 코린치안스를 탈락시켰다.
2014년 월드컵이 관계의 전환점
양측 관계가 본격적으로 가까워진 계기 가운데 하나로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이 언급된다.
현지 보도에 따르면 당시 Gaviões 관계자들은 브라질을 방문한 La12 계열 보카 팬들에게 이동과 현지 활동을 위한 지원을 제공했다.
특히 이후 La12 지도부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게 된 Lomas 계열과 Gaviões 사이의 관계가 깊어졌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관계는 단순히 구단 간 친선관계와는 다르다.
코린치안스와 보카 주니어스가 스포츠적으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더라도, 특정 서포터 조직 사이에서는 별도의 인간관계와 네트워크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남미 팬 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독특한 현상이다.
2024년에는 La12 원정단을 Gaviões가 맞이했다
양측의 관계는 최근에도 확인된다. 2024년 보카 주니어스가 코파 수다메리카나에서 크루제이루 원정을 떠났을 당시, 200명이 넘는 보카 강성 팬들이 상파울루에 들렀다.
이들을 맞이한 곳이 Gaviões da Fiel이었다. 현지 보도에 따르면 Gaviões는 상파울루 Bom Retiro 지역에 위치한 자신들의 시설에서 보카 원정팬들을 맞이했다.
2026년에는 La12 인사들이 Gaviões 창립 57주년 행사에 초청받아 상파울루를 방문하기도 했다.
즉 이번 반인종차별 캠페인은 갑자기 만들어진 관계가 아니라, 오랫동안 구축돼온 양 조직 사이의 네트워크 위에서 추진되고 있는 프로젝트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인종차별 반대 캠페인’을 추진 하는가?
이번 만남이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코린치안스와 보카 사이의 최근 역사 때문이다. 두 팀은 2022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무려 네 차례 만났다. 조별리그에서 두 차례, 16강에서 두 차례였다. 그리고 이 경기들은 여러 인종차별 사건으로 얼룩졌다.
2022년 4월 26일 상파울루 Neo Química Arena에서 열린 코린치안스와 보카의 경기에서 한 보카 팬이 코린치안스 관중을 향해 원숭이를 흉내 내는 인종차별적 행동을 했다.
해당 팬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코린치안스도 공식 성명을 통해 사건을 확인하고 법적 대응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사건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5월 17일 부에노스아이레스 La Bombonera에서 열린 경기에서도 일부 보카 관중이 브라질 원정팬을 향해 원숭이를 흉내 내는 행동을 하는 모습이 촬영됐다. CONMEBOL은 이 사건과 관련해 보카에 10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하고 추가적인 반인종차별 조치를 명령했다.
두 팀은 같은 해 리베르타도레스 16강에서 다시 만났다. 2022년 6월 28일 Neo Química Arena에서 열린 1차전에서도 보카 원정팬들의 문제가 발생했다.
브라질 경찰은 경기장에서 보카 팬 3명을 체포했다. 이 가운데 두 명은 코린치안스 팬을 향해 원숭이를 흉내 낸 혐의를 받았고, 또 다른 한 명은 나치식 경례를 한 혐의로 체포됐다.
인종차별 혐의로 체포된 팬들은 이후 각각 2만 헤알의 보석금을 낸 뒤 석방됐다. 즉 2022년 코린치안스와 보카의 맞대결은 남미 축구에서 인종차별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이번 만남은 더욱 상징적이다
4년 전에는 코린치안스와 보카의 경기에서 인종차별 문제가 반복됐다. 2026년에는 두 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강성 서포터 조직이 만나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공동 캠페인을 논의하고 있다.
그 자체로 상당히 상징적인 변화다. 물론 당시 인종차별 행위를 저지른 개별 보카 팬과 현재 La12 지도부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La 12가 캠페인에 참여한다는 이유만으로 보카 팬 문화 전체의 인종차별 문제가 해결됐다고 평가할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남미 축구장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팬 조직 가운데 두 곳이 문제 해결의 당사자로 나서겠다고 선언했다는 점이다.
Gaviões da Fiel에게 인종차별 문제는 중요한 의제다
Gaviões의 반인종차별 활동에도 별도의 배경이 있다. 2024년 Gaviões는 조직의 카니발 활동과 연관돼 있던 방송인 Ana Paula Minerato를 모든 활동에서 퇴출했다.
그녀가 브라질 가수 Ananda를 대상으로 인종차별적 표현을 사용한 음성파일이 공개된 이후 내려진 결정이었다. 코린치안스 구단 자체도 최근 경기장에서 발생한 인종차별 사건을 계기로 보다 적극적인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2026년에는 Neo Química Arena에서 발생한 인종차별 행위의 가해자를 특정하지 못하자 사건이 발생한 좌석 자체를 철거하고, 해당 장소에 반인종차별 메시지와 신고 방법을 안내하는 QR코드를 설치하는 상징적인 조치를 시행했다.
Gaviões와 La12의 공동 캠페인은 이러한 브라질 축구계의 움직임과도 연결해서 볼 수 있다.
남미 축구에서 인종차별은 두 조직만의 문제가 아니다
브라질 클럽과 아르헨티나 클럽의 국제대항전에서는 최근 수년간 인종차별 사건이 반복돼왔다. 원숭이를 흉내 내는 행위, 피부색을 겨냥한 모욕뿐 아니라 국적과 경제 상황을 비하하는 제노포비아까지 결합되기도 한다.
아르헨티나 구단들은 이러한 사건으로 CONMEBOL의 제재를 반복적으로 받아왔다. 동시에 브라질 팬들이 아르헨티나의 경제위기와 화폐가치를 조롱하는 행동 역시 문제가 되어왔다.
따라서 이번 프로젝트가 실제 국제 캠페인으로 발전한다면 그 의미는 코린치안스와 보카라는 두 구단의 관계를 넘어선다. 남미 축구의 가장 거대한 팬 조직들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이용해 축구장 내부의 차별 문제에 직접 개입하는 실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Gaviões da Fiel과 La12는 서로 다른 팬 문화에서 태어난 조직이다. Gaviões는 브라질의 Torcida Organizada 문화를 대표한다. La12는 아르헨티나의 Barra Brava 문화를 대표한다.
역사와 조직 구조, 응원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공통점도 많다. 둘 모두 단순한 응원단 이상의 거대한 사회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으며, 자신이 응원하는 구단과 도시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조직이 국경을 넘어 서로 관계를 구축하고, 특정 사회적 의제를 공동으로 추진한다는 사실은 오늘날 남미 축구 팬 조직이 어디까지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 코린치안스 Gaviões da Fiel과 보카 La12, 인종차별 근절 위해 손잡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