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장 곳곳에 새겨진 기묘한 숫자. 전 세계 축구장의 골대 뒤,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의 거친 함성 사이로 유독 자주 눈에 띄는 숫자가 있다. 그것은 바로 ‘1312’이다. 이 숫자는 현수막에, 때로는 경기장 인근의 그래피티로, 심지어는 축구 서포터의 몸에 문신으로 새겨지기도 한다. 이 네 자리 숫자는 유럽의 ‘울트라스(Ultras)’와 남미의 ‘바라브라바(Barra brava)’ 세계를 관통하는 가장 강력한 상징물 중 하나이다.

이 숫자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단순히 경찰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일까,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저항의 역사일까?
1312 & A·C·A·B : 암호화된 선전포고
알파벳 순서에 따라 숫자를 치환하면 답은 명확해진다. A(1), C(3), A(1), B(2). 이는 ‘All Cops Are Bastards(모든 경찰은 머저리다)’의 약어이다.
이 문구의 기원은 1920년대 영국 노동자 계급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를 전 세계 축구 하위문화의 보편적 언어로 만든 것은 1970 ~ 80년대 유럽의 울트라스들이었다. 그들에게 이 숫자는 특정 경찰관 개인에 대한 비난이 아니다. 이는 자신들의 자유로운 응원 문화를 탄압하고 감시하는 ‘국가 시스템과 공권력 전체’에 던지는 일종의 선전포고와도 같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공권력을 ‘공동의 적’으로 규정하는 걸까?
‘울트라스(Ultras)’에게 경기장은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성소’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 축구가 거대 자본과 결탁하며 ‘상업화’되는 과정에서 경기장 안팎의 풍경은 바뀌었다.
- 과도한 감시 : 고성능 CCTV, 무분별한 소지품 검사, 이동 경로 제한
- 문화의 박제화 : 홍염 사용 금지, 현수막 검열 등 울트라스 고유의 시각적 문화를 범죄화하는 시도
- 차별적 법 진행 : 일반 관중보다 ‘꾸르바(Curva·서포터즈 구역)’에 훨씬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공권력의 태도
이러한 압박 속에서 울트라스는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결속했고, ‘1312’라는 코드를 통해 ‘우리는 통제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된 것이다.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A·C·A·B의 어원
이 문구의 시작은 축구장이 아닌 ‘영국의 거리와 감옥’이었다.
기원을 따지자면, 1920년대 영국 노동자 계층과 범죄 조직 사이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당시 공권력과 대립하던 이들이 서로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사용하던 은어였다. 그리고 1940년대 영국 교도소 수감자들이 벽에 이 문구를 낙서로 새기기 시작하면서 널리 퍼졌다.
그 다음에는 대중 문화로 연결된다. 바로 1980년대 영국 펑크 록 밴드이 ‘4-Skins’가 ‘A.C.A.B.’라는 제목의 곡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는 기성세대의 권위에 저항하는 당시의 청년 하위문화였던 스킨해드, 펑크의 상징으로 완전히 자리 잡은 계기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ACAB는 숫자로 치환한 형태로 변화했다. 이는 알파벳 순서에 따라 ‘A=1, C=3, A=1, B=2’를 조합한 것이다. 그 이유는 경기장 내 보안 요원이나 경찰이 ‘ACAB’라는 직설적인 문구를 검열하거나 현수막을 압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울트라스들은 이를 교묘히 피하기 위해 숫자 암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숫자는 이제 검열 회피 목적을 넘어, 전 세계 울트라스 그리고 바라브라바, 훌리건 등 축구 팬들이 공유하는 일종의 ‘글로벌 코드’가 되었다.

축구장으로 전파된 1312
1970~80년대 영국 훌리건들이 펑크 문화와 결합하면서 처음 이 문구를 경기장에 가져왔다. 이후 이탈리아의 울트라스들이 이를 체계적인 ‘기존 체제 거부(Anti-Establishment)’ 정신으로 승화시켰다.
당시 이탈리아 내에서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남북 지역 간 격차와 정치 견해 차이는 각 구단을 응원하는 울트라스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줬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다양한 운동과 시위가 펼쳐졌다. 이러한 혼란이 공권력과의 대립으로 연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사회 현상이었다.
남미에도 영향을 줬다. 대표적으로 아르헨티나의 경우 군부 독재 시절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에 맞서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한 기억과 결합하여 축구 인차, 바라브라바 또한 공권력에 대항하기도 했고, 그런 상황에서 1312 상징은 공격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띠게 되었다.
현재 와서는 특정 경찰에 대한 증오보다는 축구의 상업화와 팬들에 대한 과도한 통제를 일삼는 ‘시스템에 대한 저항’을 뜻하는 기호로 쓰인다.

축구장 밖에서 증명된 ‘저항의 힘’
흥미로운 점은 이들의 저항 정신이 단지 축구장 안에서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관련 사례로 전 세계 곳곳의 정치적 격변 속에 영향력을 주었던 축구 팬들, 즉 울트라스의 모습들이 알려져 있다.
2011년 이집트 혁명
타흐리르 광장에서 경찰의 무력 진압에 맞서 시민들을 최전방에서 방어한 주역은 바로 카이로의 울트라스들이었다. 경기장에서 단련된 그들의 조직력은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강력한 힘이 되었고, 영감을 받은 대중들을 혁명의 무대로 나서게 만들었다.
터키 게지 공원 시위
평소 원수처럼 지내던 라이벌 구단이 공권력에 대항해 뭉쳤던 사례이다. 터키의 세 명문 베식타시, 페네르바체, 갈라타사라이의 서포터즈들이 ‘1312’의 깃발 아래 연합하여 정부의 권위주의에 맞선 사례는 전 세계에 큰 울림을 주었다.

이들에게 1312는 범죄자의 낙인이 아니라, 억압받는 계층을 대변하는 사회적 분노의 분출구이자 정체성이기도 하다.
물론 ‘1312’ 정신이 때로는 극단적인 폭력으로 이어지며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들이 외치는 저항의 밑바닥에는 ‘축구는 팬들의 것이며, 우리의 열정은 통제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순수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럽의 울트라스부터 남미의 바라브라바까지, 이들이 흔드는 1312의 깃발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에게 축구장은 단순한 관람석인가요, 아니면 자유를 노래하는 해방구인가요?”
참고 자료 :
Book : James Montague, 1312: Among the Ultras, Ebury Press (2020)
Article : Tobias Jones, “What is an Ultra?”, The Guardian
Data : Ultras-Tifo, Global Ultras Movement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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