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북중미 월드컵 4강에서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가 만난다.
두 대표팀이 월드컵에서 맞붙는 것은 1962년 칠레 대회 이후 여섯 번째다. 그러나 이번 경기는 두 나라가 월드컵 준결승에서 만나는 최초의 사례다. 결승 진출권을 놓고 벌이는 한 경기지만,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의 대결은 단순한 축구 경기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1966년 안토니오 라틴의 퇴장, 1982년 포클랜드·말비나스 전쟁, 1986년 디에고 마라도나의 ‘신의 손’, 1998년 데이비드 베컴과 디에고 시메오네의 충돌, 2002년 베컴의 페널티킥까지.
여기에 관중석에서 맞부딪친 잉글랜드 훌리건과 아르헨티나 축구팬들의 기억도 남아 있다.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의 축구 라이벌리는 경기장에서 벌어진 승패뿐 아니라 역사와 정치, 팬 문화와 집단 기억이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된 결과다.

축구를 전한 사람들과 그 축구를 바꾼 사람들
두 나라의 관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아르헨티나 축구의 출발점이 영국계 이주민들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다.
아르헨티나축구협회에 따르면 19세기 영국계 이주민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항구와 철도 건설 현장을 통해 축구를 전파했다. 영국인들이 세운 학교와 스포츠클럽을 중심으로 경기가 열렸고, 1867년 6월 20일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크리켓클럽에서 아르헨티나 최초의 기록된 축구 경기가 개최됐다.
스코틀랜드 출신 교육자 알렉산더 왓슨 허턴은 학교 교육에 축구를 도입했고, 1893년 아르헨티나 축구협회의 전신인 The Argentine Association Football League 창설을 주도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영국으로부터 전달받은 축구를 그대로 유지하지 않았다.
학교와 클럽에서 시작된 경기는 이민자 거주지역과 노동자 계층의 동네, 거리와 공터인 ‘포트레로’로 확산했다. 이 과정에서 아르헨티나 축구는 드리블과 개인기, 즉흥성과 교활함을 중시하는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했다.
규칙과 조직을 발전시킨 잉글랜드의 축구와, 공 하나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기술과 기지를 강조한 아르헨티나의 축구가 서로 다른 문화적 상징이 된 것이다.
영국인이 축구를 전했다면, 아르헨티나는 그 축구를 자신들의 언어로 다시 만들었다.
두 대표팀의 경쟁은 바로 이 출발점에서부터 서로 다른 축구관의 충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의 역대 월드컵 맞대결
| 대회 | 단계 | 결과 | 주요 사건 |
| 1962 칠레 | 조별리그 | 3 – 1 잉글랜드 승 | 첫 월드컵 맞대결 |
| 1966 잉글랜드 | 8강 | 1 – 0 잉글랜드 승 | 안토니오 라틴 퇴장 |
| 1986 멕시코 | 8강 | 2 – 1 아르헨티나 승 | 마라도나 신의 손, 세기의 골 |
| 1998 프랑스 | 16강 | 2 – 2 아르헨티나 승(승부차기) | 베컴 퇴장 |
| 2002 한국·일본 | 조별리그 | 1 – 0 잉글랜드 승 | 베컴 결승 패널티킥 |
| 2026 북중미 | 4강 | ??? | 양국 최초의 월드컵 준결승 |
1962년 첫 경기는 잉글랜드의 3-1 승리로 끝났지만,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라이벌리의 실질적인 출발점은 1966년으로 평가된다.
1966년, 안토니오 라틴의 퇴장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8강전은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렸다.
경기 전반 35분경 아르헨티나 주장 안토니오 라틴이 서독 출신 루돌프 크라이트라인 주심에게 퇴장을 명령받았다. 문제는 크라이트라인이 스페인어를 하지 못했고, 라틴은 독일어를 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라틴은 자신이 통역을 요청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주심은 라틴의 표정과 태도에서 모욕적인 의사를 파악했다고 설명했다. 라틴은 퇴장 명령을 즉시 받아들이지 않았고, 경기는 약 8분간 중단됐다.
그는 경기장을 떠나는 과정에서 영국 국기가 그려진 코너 깃발을 만지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위해 준비된 붉은 카펫 위에 앉았다. 라틴은 훗날 자신이 퇴장할 때 잉글랜드 관중들이 맥주 캔을 던졌다고 회고했다.

잉글랜드는 제프 허스트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경기 후 잉글랜드 감독 알프 램지는 아르헨티나 선수들을 ‘동물’에 비유했고, 선수들의 유니폼 교환까지 제지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이 경기가 유럽 중심의 월드컵 운영과 불공정한 판정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됐다.
이날 발생한 언어적 혼란은 축구 규칙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FIFA 심판위원장이었던 잉글랜드 심판 켄 애스턴은 신호등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옐로카드와 레드카드 체계를 고안했다. 카드 제도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부터 도입됐다.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의 충돌이 현대 축구의 징계 표시 체계에 영향을 준 셈이다.
포클랜드·말비나스 전쟁과 1986년의 재회
1966년의 충돌이 축구적 불신을 만들었다면, 1982년 전쟁은 두 나라의 대결에 정치적 의미를 추가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남대서양의 섬들을 ‘말비나스 제도’라고 부르고, 영국에서는 ‘포클랜드 제도’라고 부른다. 양국은 1982년 이 섬들을 둘러싸고 전쟁을 벌였다.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으며, 649명의 아르헨티나 군인과 255명의 영국 군인이 사망했다.

그로부터 불과 4년 뒤, 두 대표팀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8강에서 만났다.
공식적으로는 축구 경기였지만 아르헨티나 사회의 일부는 이 경기에 패전의 기억과 국가적 자존심을 투영했다. 훗날 마라도나도 자서전에서 당시 경기의 승리가 단순히 상대 대표팀을 꺾은 것 이상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마라도나는 한 경기에서 완전히 상반된 두 골을 남겼다.
첫 번째 골은 잉글랜드 골키퍼 피터 실턴과 경합하는 과정에서 손으로 공을 건드린 ‘신의 손’이었다. 당시 심판은 반칙을 확인하지 못했고 득점을 인정했다.
두 번째 골은 하프라인 부근에서 공을 잡은 마라도나가 잉글랜드 선수들을 연속으로 돌파한 뒤 완성한 골이었다. FIFA가 ‘세기의 골’로 소개하는 장면이다.
하나는 규칙을 속인 골이었고, 다른 하나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인기와 기술로 만든 골이었다.
두 장면은 아르헨티나 축구가 스스로 구축한 정체성, 즉 기지와 교활함을 의미하는 ‘viveza’와 공을 다루는 천재성을 동시에 상징하게 됐다.

1986년 관중석에서도 벌어진 충돌
1986년의 대결은 경기장 안에서만 격렬했던 것이 아니다.
아스테카 스타디움 관중석에서는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 팬들이 서로 뒤엉켜 주먹을 휘두르는 충돌이 발생했다. 당시 사진 자료에는 양국 팬들이 경기 도중 관중석 계단과 좌석 사이에서 싸우는 모습이 남아 있다.
후대의 아르헨티나 보도는 경기 전, 경기 도중, 경기 후에 최소 세 차례의 충돌이 있었다고 전한다.

일부 잉글랜드 팬들이 아르헨티나 국기를 빼앗거나, 반대로 아르헨티나 팬들이 잉글랜드 클럽과 대표팀 깃발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싸움이 발생했다는 참가자 증언도 있다. 관중석에서 가장 널리 촬영된 충돌은 후일 벨레스 사르스필드 회장이 된 라울 가메스가 잉글랜드 팬들과 싸우는 장면이었다.
경기 종료 후에는 아스테카 스타디움 외부에서도 충돌이 이어졌다.
멕시코 현지 매체가 1986년 당시 통신사 EFE와 현지 기록을 재확인한 보도에 따르면, 경기 후 양국 팬들의 싸움으로 잉글랜드인 6명이 다쳤다. 5명은 현장에서 치료받았고 1명은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경찰이 잉글랜드 팬들을 호텔까지 호송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이 사건이 시간이 지나면서 ‘바라브라바가 잉글랜드 훌리건을 물리친 전투’로 전설화됐다. 특히 보카 주니어스와 차카리타 주니어스 등 여러 클럽의 강성 서포터들이 충돌에 참여했다는 증언이 반복적으로 소개됐다.

그러나 주의할 부분도 있다.
당시 촬영된 사진과 현지 보도를 통해 관중석과 경기장 밖에서 실제 충돌이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된다. 반면 참가 인원, 조직적인 습격 계획, 어느 쪽이 싸움에서 이겼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증언자와 매체에 따라 크게 다르다.
관련 자료를 조사한 아르헨티나 언론 역시 영상과 사진이 부족해 사실과 전설의 경계가 흐려졌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1986년 사건을 이해할 때는 다음 두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
양국 팬들의 물리적 충돌은 실제로 존재했다. 그러나 ‘바라브라바와 훌리건의 조직적인 전쟁’이라는 이야기는 후대의 과장과 자기 신화가 결합된 서사다.
또한 충돌에 참여한 일부 강성 팬을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 전체 축구팬의 모습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1998년, 베컴과 시메오네
두 대표팀은 1986년 이후 12년 만에 프랑스 월드컵 16강에서 다시 만났다.
경기는 전반에만 네 골이 나온 난타전이었다.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와 앨런 시어러가 페널티킥을 주고받았고, 18세 마이클 오언이 폭발적인 돌파로 역전골을 넣었다. 아르헨티나는 전반 종료 직전 하비에르 사네티의 세트피스 득점으로 2-2를 만들었다.
후반 시작 직후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디에고 시메오네의 반칙으로 넘어진 데이비드 베컴이 뒤쪽으로 다리를 뻗어 보복했고, 주심은 베컴에게 레드카드를 꺼냈다. 10명이 된 잉글랜드는 승부차기까지 버텼지만 아르헨티나 골키퍼 카를로스 로아가 폴 인스와 데이비드 배티의 슛을 막으면서 탈락했다.
잉글랜드 언론과 일부 팬들은 패배의 책임을 베컴 개인에게 집중시켰다. 베컴의 인형이 목을 매단 형태로 전시되고 살해 협박이 이어질 정도로 비난은 과열됐다.
1998년의 기억은 상대 국가에 대한 적개심뿐 아니라, 패배한 사회가 내부에서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2002년, 베컴의 명예회복
4년 뒤 두 대표팀은 한·일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다시 만났다.
전반 종료 직전 마이클 오언이 마우리시오 포체티노의 수비 과정에서 넘어졌고, 잉글랜드가 페널티킥을 얻었다. 키커로 나선 선수는 베컴이었다.
베컴은 강한 슈팅으로 득점했고, 잉글랜드는 1-0으로 승리했다.
잉글랜드에서 이 골은 1998년의 퇴장과 비난을 극복한 베컴의 명예회복으로 받아들여졌다. FIFA 역시 두 경기를 연결해 베컴의 ‘복수’ 또는 ‘구원’ 서사로 소개한다.
반대로 아르헨티나는 우승 후보로 평가받고도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같은 한 골이 잉글랜드에는 4년간 기다린 구원이었고, 아르헨티나에는 예상하지 못한 조기 탈락으로 이어진 상처가 됐다.

선수들은 경기를 말하지만, 팬들은 역사를 노래한다
2026년 대표팀 선수 대부분은 1966년과 1986년의 사건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 1998년 경기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가 많다.
아르헨티나 대표팀 리오넬 스칼로니 감독도 이번 경기를 두고 “축구 경기일 뿐”이라며 정치적 의미를 확대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팬 문화에서는 과거가 계속 소환되고 있다.
아르헨티나가 2026년 월드컵 4강 진출을 확정한 뒤 선수와 팬들은 함께 점프하며 다음 구호를 불렀다.
“El que no salta es un inglés.”
“뛰지 않는 놈은 잉글랜드인이다”
라커룸에서는 말비나스, 마라도나와 메시를 연결한 노래도 등장했다. 선수들은 역사적 의미가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최우선 목표는 결승 진출이라고 강조했다.
이 구호는 아르헨티나 축구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응원 형식이다.
팬들이 집단적으로 점프하면서 상대편을 ‘뛰지 않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움직이고 노래하며 버티는 자신들과, 그렇지 못한 상대를 구분하는 행위다.
여기에는 아르헨티나 팬 문화의 중요한 가치인 Aguante가 드러난다.
Aguante는 단순한 열정이 아니다. 경기 내내 노래하고 점프하며 팀과 함께하는 지속성, 상대의 압박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태도, 자신이 더 강한 팬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집단적 실천을 의미한다.
잉글랜드를 향한 오래된 구호는 Aguante가 국가대표 응원문화에서도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왜 이 라이벌리는 사라지지 않는가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는 지리적으로도, 소속 대륙도, 일상적으로 참가하는 축구대회도 다르다.
두 나라가 정기적으로 맞붙는 것도 아니다. 2026년 이전 마지막 월드컵 대결은 2002년이었다.
그럼에도 두 대표팀의 라이벌리가 유지되는 이유는 매번의 경기가 강력한 상징을 남겼기 때문이다.
- 1966년에는 논쟁적인 퇴장과 불공정성의 기억이 남았다.
- 1986년에는 전쟁의 상처와 마라도나의 두 골이 결합했다.
- 같은 경기 관중석에서는 양국 강성 팬들이 실제로 충돌했다.
- 1998년에는 베컴과 시메오네가 새로운 적대 서사를 만들었다.
- 2002년에는 베컴의 명예회복과 아르헨티나의 탈락이 교차했다.
- 2026년에는 과거를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다시 그 기억을 이어받았다.
라이벌리는 선수들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신문의 제목, 방송 중계, 가족에게 전해 들은 월드컵의 기억, 반복되는 응원가와 오래된 영상이 다음 세대에 적대와 자부심을 전달한다.
선수들은 현재의 경기를 치르지만, 팬들은 과거의 경기까지 함께 응원한다.

2026년, 새로운 기억이 만들어진다
2026 북중미 월드컵 4강은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가 월드컵에서 만나는 여섯 번째 경기이자 최초의 준결승이다.
이번 경기에는 라틴도, 마라도나도, 젊은 시절의 베컴과 시메오네도 없다. 과거의 전쟁과 관중석 충돌을 직접 경험한 선수도 없다.
그러나 경기장에는 그들의 기억이 존재한다.
잉글랜드 팬들은 1986년의 ‘신의 손’과 1998년의 승부차기를 기억하고, 아르헨티나 팬들은 1966년의 라틴과 말비나스, 마라도나의 두 골을 노래한다.
축구를 전한 나라와 그 축구를 완전히 다른 문화로 바꾼 나라.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의 대결은 결국 어느 팀이 더 강한가를 넘어, 서로 다른 두 축구 문화가 자신들의 역사와 정체성을 어떻게 기억하는지를 보여주는 경기다.
2026년의 승자는 결승에 진출한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만들어진 장면은 다시 양국 팬들의 노래와 기억 속에 남아 다음 만남으로 전달될 것이다.

참고 자료 :
아르헨티나축구협회 역사 자료
FIFA 1966 월드컵 및 카드 제도 자료
FIFA 1998 잉글랜드-아르헨티나 경기 기록
Reuters 양국 라이벌리 및 2026년 팬 반응 보도
Getty Images 1986년 관중석 충돌 사진 기록
EFE·멕시코 현지 기록을 인용한 1986년 경기장 외부 충돌 보도
TyC Sports의 1986년 팬 충돌 기록 및 사실·전설 구분
[ 전 세계가 매료된 ‘아르헨티나 인차’, 그들의 열정이 벤치마킹 대상이 된 이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