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과 산 로렌소|소시오 88,235번의 평생

프란치스코 교황과 산 로렌소|소시오 88,235번의 평생

축구가 종교에 가까운 열정으로 받아들여지는 나라 아르헨티나.

그곳에는 실제로 종교와 축구가 한 사람의 삶 안에서 만난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 2013년부터 2025년까지 가톨릭교회를 이끌었던 프란치스코 교황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축구 클럽 산 로렌소 데 알마그로의 관계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되기 전 그의 이름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였다. 그는 세계 가톨릭교회의 수장이면서 동시에 산 로렌소의 공식 소시오였고, 회원번호 88,235번​을 가진 평생의 인차였다.

그에게 산 로렌소는 단순히 좋아하는 축구팀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의 가족과 고향, 보에도의 거리와 아르헨티나인으로서의 기억을 연결하는 문화적 뿌리였다.

1946년 비에호 가소메트로에서 시작된 팬심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와 산 로렌소의 인연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아버지 마리오 베르골리오의 손을 잡고 아베니다 라 플라타에 있던 산 로렌소의 옛 홈구장, 비에호 가소메트로를 찾았다. 그가 특히 선명하게 기억했던 팀은 1946년 아르헨티나 리그를 제패한 산 로렌소였다.

당시 산 로렌소는 아르만도 파로, 르네 폰토니, 리날도 마르티노가 이끄는 공격진을 앞세워 아르헨티나 챔피언에 올랐다. 이른바 ‘황금의 트리오’로 불렸던 이들은 우승 이후 유럽 원정에서도 뛰어난 경기력을 선보이며 구단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장 좋아했던 선수는 중앙 공격수 르네 폰토니였다. 산 로렌소 구단 역시 폰토니를 “교황 프란치스코의 영원한 우상”으로 소개한다.

교황이 된 뒤 산 로렌소 관계자들과 만날 때마다 1946년 팀과 폰토니의 이름이 자주 등장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산 로렌소 사랑은 유명인이 된 뒤 만들어진 이미지가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보냈던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시작됐다.

산 로렌소 소시오 88,235번

베르골리오는 산 로렌소 창단 100주년이었던 2008년 구단의 공식 소시오가 됐다. 그에게 발급된 회원번호는 88,235번​이었다.

이후 2013년 교황에 선출된 뒤에도 산 로렌소 회원 자격을 유지했다. 구단 관계자들에 따르면 그는 바티칸에 머무는 동안에도 회원 회비를 계속 납부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산 로렌소 유니폼이나 깃발을 든 사람들을 만났을 때 회원증을 보여주거나 구단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도 여러 차례 공개됐다. 이는 상징적인 명예 팬이 아니라 실제로 클럽에 소속된 소시오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는 훗날 자신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산 로렌소의 팬이라는 것은 내 문화적 정체성의 일부입니다.”

산 로렌소는 그에게 경기 결과를 확인하는 대상인 동시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살아온 자신의 역사와 정체성을 기억하게 하는 장소였다.

산 로렌소 예배당과 앙헬 코레아의 특별한 기억

프란치스코 교황과 산 로렌소의 관계는 경기장 밖에서도 이어졌다.

2011년 5월 24일,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였던 베르골리오는 산 로렌소 시우다드 데포르티바에 위치한 파드레 로렌소 마사 예배당에서 미사를 집전했다.

그는 예배당 창문 너머로 산 로렌소 경기장이 보이는 것에 큰 기쁨을 느낀다고 말했고, 구단의 청색과 적색에 대해서도 종교와 축구를 결합한 농담을 남겼다.

이날 산 로렌소 유소년 선수였던 앙헬 코레아와 조나탄 파체코는 베르골리오 대주교에게 견진성사를 받았다.

코레아는 이후 산 로렌소 1군에서 활약한 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했고,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2022년 FIFA 월드컵 우승 멤버가 됐다.

세계 챔피언이 된 축구선수가 유소년 시절 훗날 교황이 될 인물에게 견진성사를 받았다는 사실은 두 사람과 산 로렌소를 연결하는 특별한 에피소드로 남아 있다.

교황 즉위와 함께 찾아온 두 번의 우승

2013년 3월 13일,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는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제266대 교황에 선출됐다.

그리고 그해 말 산 로렌소는 토르네오 이니시알 우승 경쟁에 뛰어들었다.

2013년 12월 15일, 산 로렌소는 우승 경쟁팀 벨레스 사르스피엘드와의 최종 원정경기에서 0:0으로 비겼다. 경기 막판 벨레스의 아구스틴 아요네가 강력한 슈팅을 날렸지만, 산 로렌소 골키퍼 세바스티안 토리코가 이를 막아냈다.

같은 시간 뉴웰스 올드 보이스와 라누스도 2:2로 비기면서 산 로렌소의 우승이 확정됐다.

토리코의 선방은 구단 역사에 남은 결정적인 장면이 됐다. 당시 산 로렌소 부회장이었던 마르셀로 티넬리는 디에고 마라도나의 ‘신의 손’을 빗대어 이를 “신의 손이자 교황의 손”이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우승을 차지한 산 로렌소 대표단은 바티칸을 찾아 프란치스코 교황과 기쁨을 나눴다.

구단 최초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교황 즉위 이듬해인 2014년에는 더욱 역사적인 일이 벌어졌다.

산 로렌소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에서 파라과이의 클루브 나시오날을 꺾고 창단 이후 처음으로 남미 정상에 올랐다.

아순시온에서 열린 1차전은 1:1로 끝났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네스토르 오르티고사의 페널티킥 득점으로 산 로렌소가 1:0 승리를 거뒀다.

오랫동안 산 로렌소 팬들이 기다려온 첫 번째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이었다.

우승 이후 구단 선수들과 관계자들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트로피를 들고 바티칸을 방문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산 로렌소 구성원들과 함께 우승컵을 들며 구단 역사상 가장 특별한 기념사진 가운데 하나를 남겼다.

교황이 된 직후 리그 챔피언에 올랐고, 이듬해에는 첫 리베르타도레스까지 차지하자 팬들은 이 시기를 ‘교황의 축복’과 연결해 기억하기 시작했다. 물론 경기 결과와 교황 사이에 실제 인과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팬 문화 속에서는 산 로렌소의 가장 신성한 우승 서사로 자리 잡았다.

경기를 보지 못했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산 로렌소 팬

흥미롭게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산 로렌소 팬은 경기를 텔레비전으로 시청하지 않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990년 성모 마리아에게 한 약속 이후 텔레비전을 보지 않았다고 밝혔다. 교황이 된 뒤에도 이러한 생활방식을 유지했다.

따라서 그는 바티칸에서 산 로렌소 경기를 실시간으로 시청하는 대신 라디오를 이용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경기 결과를 전달받았다. 바티칸을 경호하는 스위스 근위대원들이 산 로렌소와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경기 결과를 알려주기도 했다.

교황은 경기 영상을 직접 보지 않으면서도 팀의 순위와 결과를 확인했고, 구단 관계자나 팬들을 만날 때마다 산 로렌소에 관한 대화를 이어갔다.

에스타디오 파파 프란치스코와 부엘타 아 보에도

산 로렌소 팬들에게 가장 중요한 숙원은 보에도로 돌아가는 것이다.

구단은 군사독재 시기 압박을 받으며 아베니다 라 플라타에 있던 비에호 가소메트로 부지를 떠나야 했다. 이후 해당 부지는 대형 유통업체에 넘어갔고, 산 로렌소는 보에도를 벗어난 바호 플로레스에 페드로 비데가인 경기장을 건설했다.

그러나 팬들은 옛 경기장이 있던 장소로 돌아가기 위한 ‘부엘타 아 보에도’를 오랫동안 추진했다. 구단과 회원, 팬들이 함께 벌인 이 운동은 단순한 경기장 이전을 넘어 빼앗긴 지역적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사회운동으로 발전했다.

2024년 산 로렌소 대표단은 바티칸을 방문해 보에도에 건설할 신축 경기장에 ‘파파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사용할 것을 공식적으로 제안했다. 구단 발표에 따르면 프란치스코 교황도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아베니다 라 플라타 부지의 기존 건물 철거와 지반조사가 진행됐다. 2026년 5월에는 구단이 부지 내 잔여 8,345㎡에 관한 무상 사용권 협약을 체결하며 신축 경기장의 설계와 건설을 추진할 수 있는 추가 기반을 확보했다.

다만 ‘에스타디오 파파 프란치스코’는 아직 완공된 경기장이 아니다. 현재는 부지 정비와 설계·건설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으며, 산 로렌소의 보에도 복귀가 최종적으로 완성된 상태는 아니다.

팬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거룩한 인차’의 일화

※ 다음 내용은 교황청이나 산 로렌소 구단의 공식 기록으로 명확하게 확인된 발언이 아니라, 산 로렌소 팬들과 현지 축구 문화권에서 전해지는 일화에 가깝다. 실제 발언이나 사건으로 단정하기보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존재가 팬 문화 속에서 어떻게 전설과 유머로 확장됐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 베드로 광장에서 일반 알현을 진행할 때 산 로렌소 유니폼이나 깃발을 든 팬들을 발견하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한 팬이 “교황님, 산 로렌소가 올해 우승할까요?”라고 묻자 엄지를 들어 보이며 “당연하지. 카스라(CASLA)는 언제나 최고야”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보카 주니어스나 리버 플레이트 유니폼을 입은 사람을 만났을 때는 미소를 지으며 “회개하라”고 농담했다는 일화도 팬들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전해진다.

산 로렌소가 교황에게 헌정할 특별 유니폼을 제작하면서 바티칸에 디자인 초안을 보내 의견을 구했고, 교황이 화려한 장식보다 청색과 적색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전통적인 디자인을 선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공식 자료로 확정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지만, 이러한 일화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권위적인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산 로렌소 팬들과 농담을 주고받는 친근한 인차로 기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축구 팬 문화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객관적으로 기록된 사건만은 아니다. 반복적으로 전해지고 재해석되는 이야기 역시 공동체의 기억과 정체성을 형성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산 로렌소 팬들에게 종교적 지도자인 동시에, 자신들과 같은 색을 사랑했던 한 명의 꾸엘보였다.

소시오 번호 88,235에 남은 우연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5년 4월 21일 오전 7시 35분, 바티칸의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88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그의 선종 이후 산 로렌소 팬들 사이에서는 회원번호 88,235번​이 다시 주목받았다.

교황이 선종한 나이는 88세였고, 아르헨티나 현지 시각으로 환산한 선종 시각은 오전 2시 35분이었다. 두 숫자를 이어 붙이면 그의 산 로렌소 회원번호인 88,235가 된다.

이는 어디까지나 우연의 일치다. 그러나 상징과 징크스, 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축구 팬 문화 속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산 로렌소의 인연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처럼 받아들여졌다.

산 로렌소가 가장 유명한 소시오를 떠나보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이후 산 로렌소는 구단의 가장 유명한 팬을 위한 추모 행사를 진행했다.

구단은 교황을 위한 미사를 열었으며, 선종 이후 처음으로 열린 로사리오 센트랄과의 홈경기에서도 대규모 추모 행사를 마련했다.

페드로 비데가인 경기장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진과 바티칸 국기, 실물 크기의 조형물이 등장했다. 선수들은 교황을 기념하는 특별 유니폼을 착용했고, 경기 전에는 추모 영상과 묵념이 이어졌다.

관중석에는 ‘Juntos por la Eternidad’, 즉 ‘영원히 함께’라는 문구가 내걸렸다.

이는 유명 인사 한 명을 추모하는 행사를 넘어 산 로렌소라는 공동체가 자신들의 오랜 소시오를 떠나보내는 장면이었다.

고향을 기억하는 가장 따뜻한 방법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축구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었다.

산 로렌소는 아버지와 함께 찾았던 비에호 가소메트로의 기억이었고, 1946년의 르네 폰토니였으며, 보에도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올리게 하는 고향의 상징이었다.

교황이 된 뒤에도 그는 회원번호 88,235번의 소시오로 남았다. 산 로렌소 역시 유니폼과 우승컵, 미래의 경기장과 팬들의 노래를 통해 자신들의 가장 유명한 인차를 기억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직접 말했듯, 산 로렌소는 그의 문화적 정체성의 일부였다.

그리고 산 로렌소 팬들에게 프란치스코 교황은 영원히 자신들과 같은 청색과 적색을 사랑했던 한 명의 꾸엘보로 남을 것이다.

참고 자료 :
ncronline – Pope Francis honored by his favorite soccer club San Lorenzo
slmedia – Pope Francis the soccer fan
elconfidencial – Francisco, el papa hincha del San Lorenzo que quiso ser futbolista

[ 사우스 위너스, 프란치스코 교황에 경의를 표하다 ]

[ 산 로렌소 바라브라바 La Gloriosa Butteler 이야기 ]